그리스도의 편지

문제 해결자 되신 예수님

어저나 2009. 12. 23. 11:22

문제 해결자 되신 예수님 ( 요 5 : 2 ~ 18 )               (2009. 12. 20)


예수님은 한 분 이시지만 동일한 분이시지만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다르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의 환경이 달라서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축복의 대상으로, 다른 이는 고통의 해결자로, 또 병을 치유하는 능력의 구세주로, 지식을 갈급해 하는 이에게는 지식의 근원자로, 삶의 자유를 위해 일하는 이에게는 삶의 해결자로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방편으로 종교의 대상으로 사회 운동의 대변자로 끌어들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강절 넷째 주 세상을 밝히려 인류를 구원하러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지만 그를 만난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나셨다는 사실은 미리 안 동방박사는 헤롯의 궁궐을 찾았고 헤롯왕은 자신의 자리를 두려워했고 수많은 아이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왕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목자들과,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와 성전에서 시므온과 84년 과부된 여선지자 안나에게 경배와 축복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메시야를 열망하던 바리새인, 서기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신 그날 일상의 하루를 보냈을 뿐입니다. 징조는 있었지만 그것을 알고 찾은 사람은 몇 명 안 되었습니다. 주님의 재림 역시도 징조는 있을 것이나 그날은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예비 된 정결한 신부만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대강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는지요? 혹 대강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가 연속으로 설교하고 있는데 아직도 중심(요점)을 잡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요?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드리고 있는 질문은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제가 딩동댕 정답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확고한 신념, 믿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예수님은 과연 어떤 존재로 내안에 살아계시는가를 알고 싶어서입니다. ‘사도신경’고백한다고, 예배에 있다고, 십일조를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내안에 진정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삶이 고통 속에 있으며, 행복하지 않고 슬픔 속에 있으며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은 채 KTX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은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가 고상해 보이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깊은 생각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물음 앞에 와 있습니다. 솔직히 제 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언 가에게 몰두하고 싶습니다. 전 이때까지 한 몸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잘 해 왔습니다. 두 세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의 회전이 빨랐고 센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했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몰입하면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수요일 성경공부 마치고 학원에 ‘수학’수업 할 때가 되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고 몇 번을 마음을 잡고 집중해야 문제가 풀어지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됩니다. 설교 준비하다가 저녁에 수업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 까지 합니다.


수요일 아내에게도 말했습니다. “예수에 미쳐버리고 싶다”라고 했을 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지 위해 죄인이 되어 총독 베스도와 이야기를 하며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을 말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때 베스도는 크게 소리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바울이 미쳤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그를 위해 일생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 예수님 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모든 시간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장막을 만드는 일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이것이 더 행복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세상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설교자이자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신비한 능력이나 사람을 끌 어떤 큰 매력을 지닌 사람도 아닙니다. 유복성이라는 째즈하는 분인데 복을 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이제 칠십이 되니 북을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 말이 무슨 알인지 조금은 알듯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뜻하지 않게 장애인 사역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고 목사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조금 알 듯합니다. 내 존재 속에 어떻게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지 알 듯합니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기 원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밭은 희어져 있는 데 추수할 일군이 적도다.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12제자를 세웠습니다. 바로 그 일에 제가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슴 깊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니라도 영광교회를 이끌 사람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보다 더 능력 많은 사람이 이곳을 맡아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하고 약한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 만들려고 지금까지 참고 기다렸구나! 주님께 참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난 수요일(어제 목요일 지금 설교 원고 타이핑 중) 제법 추웠습니다. 수요 기도회를 마치고 장준휘를 데리고 학사로 가는 동안 준휘가 봉화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근 10년을 지내면서 봉화에 살고 있고 농사군의 아들 ‘촌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영광교회를 이전하고 아내와 크게 다툰 적이 있습니다. 교회와 학사가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혹 아이들이 다칠지 모르니 예배를 마치면 아이들을 데리고 학사까지 꼭 같이 가주어야 한다고 아내가 저에게 강력하게 건의를 했습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듣지 않다가 아내와 크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수요일을 매주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같이 오가기로 결심했고 지난 주 수요일이 2009년 광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수요일 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함께 해준 박세흠집사님 가정, 오병희집사님, 이현미 간사님, 한혜정자매님, 저의 아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함께 해 주진 못했지만 함께 영광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혼자의 힘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동역자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 아이들과 함께 오가는 것도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서론이 기네요. 전 설교에 1/3 정도를 서론에 할애합니다. 이제 습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들어 가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의 이름이 말하듯이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하면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유하는”일을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단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독특한 것은 선지자들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의 세례’만 전하였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배하는’사역에만 집중했습니다. 자신 뒤에 올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드러내셨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사람들은 궁시렁 궁시렁 거립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내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신 분이십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정당한 일을 했음에도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18절“유대인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그 이유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치유된 38년 된 병자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인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에 관심만 있고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영과 육의 문제를 분리하는데 급급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질병의 근원은 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과 사망과 아담의 범죄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영과 육이 살아날 때 병이 낫는 것은 우리의 죄가 없어짐으로 사해짐으로 참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의 근원에 죄를 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양문이 있습니다. 양문은 성소에 양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출입한 통로이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물의 동요를 일반 사람들은 천사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천사로 인해 물이 환류 현상을 일으킬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못 주변에 희망을 걸고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석가들(성경학자들은) 이 환류현상은 일종의 자연천의 간헐적 작용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많은 병자들은 베데스다 못에 물이 동함을 알고 있었고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나음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초자연적인 신비현상에 자신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많은 문제 봉착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과거 시대의 사람들 보다 오늘 우리가 더 복잡한 문제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에는 리처드 포스터가 ‘돈, 섹스, 권력’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단에게 ‘빵’의 문제 경제의 문제의 시험을 뿌리치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사들이 도와줄 것이다. 그르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게 될 것이라. 멋이게 보이라는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스타의식, 권위주의를 이겨내신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힘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좋아합니다. 권력을 통하여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과 힘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제가 알지 못하는 많은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못 먹고의 문제에 직면한 분들도 있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더욱 경제적인 사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디가도 ‘돈’ 이야기입니다. TV에도 토크쇼의 이야기들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부끄러운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를 소유하지 않는 삶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문제의 중심에 ‘돈’이 들어가 있습니다. ‘생각대로 해’입니다. 각자의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다 가치 사회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혼란한 사회입니다. 우리는 제 3의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전에는 ‘민주주의’라는 사회를 이상으로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민주화를 이루어내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우리의 ‘공공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개념이라 할지라도 함께 흥분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점차 그것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급속히 개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원자화’ 되어 분열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모른 채 지내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많은 진리들이 사라졌고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보십시오. 그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38년 동안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 모른 채 고통 속에서만 살아왔습니다. 38년이 작은 시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문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통의 문제 속에만 빠져 있지 말고 문제 중심을 바라보십시오. 38년 된 병자처럼 긴 세월을 헛되이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을 어찌 그냥 놓치려 합니까? 38년 된 병자의 근원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죄’였습니다. 그를 억누르고 고통 속에 살아가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죄였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밑바닥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죄라기보다는 근원적인 죄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질 수 밖에 없었던 아담의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죄는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남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근원에는 어둠의 세력 사단이 있습니다. 이것을 멸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좀 더 냉철하게 죄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연역한 본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된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포장하려 합니다. 너희가 지혜와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처럼 높아지며 심지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계속 유혹합니다. 삶의 고통의 문제는 좋은 직장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권력을 지니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면 너의 권위가 높아지면 너의 자아상이 높아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계속 말합니다.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육신의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죄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걸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두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일하는 날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고통의 근원에서 해방하여 참 자유를 누르게 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58)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2)  (0) 2010.01.11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1)  (0) 2010.01.02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0) 2009.12.23
"생각대로 해"  (0) 2009.12.23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0) 2009.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