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1)

어저나 2010. 1. 2. 22:04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1) ( 대하 29 :1 ~ 28 )                  (2010. 1. 3)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

열왕기 말씀을 잃다 보면 소망과 희망의 역사도 있지만 북 이스라엘의 잘못된 행위로 인한 심판에 대한 말씀과 멸망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쫒아서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왕들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 왕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유다의 역사 역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수많은 잘못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운 왕들을 일으켜서 회복시키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과 심판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기의 말씀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역대기의 끝에는 유다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방인의 왕 고레스를 통하여 해방된 유다왕국의 재건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의 유대왕의 기록에도 그들의 죄를 말씀하고 간략히 넘어가고 있으나 역대기에는 유대 왕들의 겸비함(회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들이 다시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므낫세 왕에 대한 평가

가장 대표적인 실례로 유다 왕 므낫세에 대한 기록입니다. 므낫세왕은 극악무도한 왕으로 유다가 멸망하게 되는 가장 큰 죄악을 저지른 왕입니다.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일월성신을 숭배하였으며 성전에 재단을 쌓았습니다. 또 자기의 아들을 불에 지나게 했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이방신에게 번제로 드렸다는 일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는 이루 말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유다도 이방에 멸망당하게 하실 계획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대하 33:11~13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 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하나님은 그 부정한 임금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 때 그를 다시 왕의 자리로 복원시켰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열왕기의 기록이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에 있다면 역대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동시에 들어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역대기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며 그들을 어떻게 인도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혁운동과 부흥

역대기에 있는 히스기야왕의 말씀을 읽으면서 진정한 개혁이 무엇이며 부흥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부흥인 “야곱의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의 엄위사심이 예배 가운데 임한 모세 시대의 “시내산에서의 부흥” 사사기 시대에 사무엘을 통한 “미스바 대 부흥운동” 다윗과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건축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는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크고 작은 부흥들이 물결처럼 도도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흥의 역사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부흥은 성경시대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곳에서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갈망하고 꿈꾸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흥은 영적으로 개인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원과 헌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사람의 작품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는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부흥이 있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역사 속에 임재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부흥을 관념적이거나 자신의 의지로 일으키려는 생각은 그 발상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며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들이 시작됩니다.


현상을 보지 말라.

부흥을 말할 때 사람들은 나타나는 현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증으로 이어갑니다. 부흥은 외적인 현상을 동반하지만 그보다 더 내면세계와 자신의 전 부분이 하나님의 이끌림 속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유가 있고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넘친다고 그것을 부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속에서 누가 영광을 받고 있으며 그 중심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부흥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흥분되어 격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속에서 하나님의 갈망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래 동안 죄 때문에 침울해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내 자신이 혼절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내려놓은 채 멍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과 다른 만져주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속의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흥을 우리의 보편적인 시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기에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혹 아직도 부흥이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부흥은 개인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가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교회적으로 지역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흥을 사람의 생각으로 지역과 경계를 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나타난 현상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이 은혜를 받으면 부흥이 일어난 것이고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부흥이 아니라는 식의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그 초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개혁

웃시야, 요담, 선한 왕을 이은 아하스, 그는 선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전의 물건을 함부로 앗수르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익이 없었습니다. 아하스왕은 하나님 전의 기구를 부수고 여호와 전의 문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산당을 세워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왕의 묘실에 들지 못하는 부끄러운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히스기야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인지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선조 시대에 무너졌던 성전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실행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왕이 된 후 한 첫 번째 사역은 성전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된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그는 왕이 되고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유다왕국에 가장 우선이 되는 일이 바로 성전 수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 치의 미룸이 없이 곧바로 일을 실행했습니다. 우리는 선거를 할 때가 되면 사람들이 많은 공약들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공약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번 정권에서 MB는 벌써 몇 번째나 ‘대운하 사업’은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진정성을 사람들이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추진력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국민을 위한 일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지금의 유다가 다윗과 솔로몬 때보다 국운이 기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 아하스가 성전 문을 닫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이방신에게 절하게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을 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흥은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과거의 죄의 청산이 이루어졌습니다. 부끄러웠던 과거를 다 드러내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죄이든 아버지의 죄이든 다 드러내야 합니다. 나를 세우기 위해 선조의 잘못을 두둔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정권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그 선조의 잘못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개혁운동은 잘못됨의 시인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자신을 정결히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그러한데서 출발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명했습니다.

성소에 더러운 것을 제하라는 것은 성소 안에서 까지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그곳에 이방 선지자와 제사장이 짓밟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성소 안에서 자행된 하나님의 거역한 행위는 엄청난 죄악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소를 정결케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부흥 역시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안에 잡다한 죄악이 거하지 못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단은 내 생각과 뜻과 의지를 꺾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를 종용합니다. 그리고 교회 또한 정갈해져야 합니다. 음란과 분쟁과 당 짓는 것과 수근수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계략입니다. 사단은 부단히 분열시키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혈기를 제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혈기 부리는 것은 용감한 것으로 오해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혈기는 자신의 의지에서 온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시는 밤에 종의 귀를 자르는 혈기를 부렸지만 그 밤에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혈기 부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을 불로 살라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우뢰의 아들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그런 요한은 나중에 사랑의 사도로 변모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릇된 모양은 부흥을 통하여 연마되어져야 합니다.


부흥은 많은 사람이 회심하지만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부흥을 주도합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휫 필드, 죤 웨슬레, 하월 해리스, 이반 로버츠 등 이들의 헌신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 역시 몇 사람들의 기도와 준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원산에서 선교사님들이 자신의 전도 방법과 전도 지역 다툼의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회개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장로님에 의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회개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흥의 주역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이 들어 쓰시기를 기도합니다. 나 하나의 변화는 나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여러분 ‘나비효과’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나비의 날갯짓으로 생긴 공기의 이동이 거대한 태평양의 기류를 타게 되면서 허리케인이 될 기류에 합쳐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이런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 큰 불길을 일으키는 놀라운 일입니다.


셋째는 빠짐없이 다 순결해져야 합니다.

일부분이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다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죄악은 씻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된 우리는 육신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악의 법아래 거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죄의 종에서 벗어났으나 나의 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에서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완전할 수는 없는 거잖아? 라는 핑계에서 벗어나 순결한 사람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부흥의 시기에는 사람들이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어 죄를 멀리할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의 부흥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시대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대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흥을 경험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흥을 노래하고 꿈꾸는 돼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일어나는 부흥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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