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2)

어저나 2010. 1. 11. 12:24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2) ( 대하 29 : 25 ~ 36 )              (2010. 1. 10)


20대 때는 ‘정의’ ‘개혁’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미어오고 뭉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에는 무언지 모르게 교회에 대한 강한 불만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교회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처 두고 교회 일에만 몰두하던 그 시절이 청소년기였습니다. 그 때에는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흥, 심령의 새로워짐을 경험한 그 시간이 끝나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했습니다. 20대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에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내 생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보단 사람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삶을 막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던 예수를 바라만 봤지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속에 계신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일은 지켰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잘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사람들의 모습만 보고 있었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멍해 있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는 더 심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웠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잊어갔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남주와 김지하의 시를 읽으면 분노했고 무엇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긴 밤을 치열하게 보냈습니다.


한동안은 세상을 바뀌지 않고 기득권자의 세상이 될 것 같아 치를 떤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예상치 못한 변화가 동구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폴란드에서 바웬사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변화는 것을 보면서 역사는 인간의 주도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변화가 일어나지만 변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61년에 동독에 의해 구축된 동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동독 집권당 정치국  위원이자 대변인이었던 ‘권터 사보프스키’의 우발적인 실언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 1989년 11월 9일 저녁 기자회견을 통해 사보프스키가 발표하도록 혜정된 것은 동서독 국경 개방이 아니라 동구권 여행자유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전날 정치국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모르던 사보프스키가 “동구권 여행자유화 조치에도 서독이 포함되느냐?”는 서방 기지들의 우발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대역사적 격변의 물꼬를 틀었습니다. 서방 기자들이 재차 “언제부터 이 조치가 발효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즉각”시행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사보프스키의 기자회견을 들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국경초소로 쇄도하여 국경 초소 경찰들을 설복시켜 서베를린으로 대거 월경함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인간의 역사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예상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

히스기야 시대의 부흥을 깊게 생각해 봅니다. 36절 말씀입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은 급격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예상된 경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지기에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일제시대에 곳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을 통하여 사람들을 예비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중국과 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하며 일찍부터 부흥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갔으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고 그러면서 70, 80년대에 급격한 부흥운동이 전국을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대부흥운동 역시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캠브리지에서 공부하던 청년들이 ‘HOLY CLUB’의 결성하여 찰스 웨슬레, 존 웨슬레, 휫필드 등이 기도했고 이들이 영국의 대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부흥’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지만 갈망하는 이를 통하여 분명히 이루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도 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찾아올 부흥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준비해야 합니다.

부흥은 신앙의 회복, 원래의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늘 갈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끄실 때 갑자기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구원은 긴박성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을 구하기 위해 심판하시기 전날 천사를 보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말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말씀하셨으며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으로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급격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항상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슈퍼컴퓨터를 몇 대를 사고 기상전문가를 초청해서 기후의 변화를 알려고 했지만 10cm의 적설량을 예상했으나 25.8cm의 적설을 기록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기계로 공기의 움직임을 알고 싶어하지만 제대로 찾아내지 못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부흥을 연구하고 성경을 연구하지만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어디에서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불타오르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예측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공기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자신의 임의대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기도하고 애쓰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갈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하여 먼저 성전을 정결히 했으며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전된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제사 드리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히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흥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을 경험하고 싶습나까?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를 쉽게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존 낙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십만대군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라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사단은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부흥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추수할 사람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회중들이 번제물을 가져옵니다. 상상하지 못할 장도로 많은 제물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부족하여 그 모든 번제 짐승들의 가죽을 벗기지 못하는 고로” 부흥의 시대가 되며 교회가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체계적인 신앙을 양육할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목사님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갈 때 600명을 뽑았습니다. 최근에 보니까 300명 정도를 뽑았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사역자가 부족한 시대가 곧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흥의 시대를 준비한다면 교회에 신앙의 일군들이 준비도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초신자가 10명이 들어오면 그들을 신앙인으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만약 100명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준비된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회입니다.


성경에는 백성들의 번제물을 제사장이 다 감당하지 못하자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 일을 마치기까지 돕고 다른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기까지 기다렸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역자가 부족하다면 동역자를 준비시켜야 합니다. 말씀전할 준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하여 성도들이 동역자가 되어 함께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도 제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직임을 나누고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 구제와 봉사는 집사들을 세워 그들이 일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교회가 조직화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각자 서로 짐을 나누어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추수할 일군을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일을 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각 영역에서 달란트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직임은 고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번제를 드리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베끼고 내장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백정들이나 하는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 일을 기뻐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이 일은 고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도 복음전하는 일보다는 목사라는 직업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회를 하니까 말씀 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웠습니다. 책임감도 따르고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의사와 같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이 신성한 직무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명감, 소명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의 직임을 감상적으로 준비해서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이 부흥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부흥을 갈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짐승의 배를 갈라 더러운 것을 끄집어내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와 성결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목사는 사람들의 부정됨이 있다면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 분명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죄를 파하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전하지 않아도 찾아옵니다.

백성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수소와 숫양과 어린 양을 가지고 왔습니다. 구별하여 드린 소가 육백마라였으며 “수소가 칠십 마리요 숫양이 백 마리요 어린양이 이백 마리이니” 제사장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1907년 평양에는 주일에는 가게가 문을 닫고 길이 한산했다 합니다. 다 교회에 갔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웨일즈 부흥운동 때는 광산 지역에 많은 술집들이 문을 닫고 오락장이 폐쇄되었으며 사람들은 교회에 모이어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범죄가 사라지고 음란함과 거짓됨이 사라지며 세상의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지 위해서만 오직 힘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부흥을 꿈꿉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며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그 나라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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