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거라사 축사 사건

어저나 2009. 4. 19. 21:21

전체적으로 볼 때 4장 35절에서 41절의 풍랑을 제어하심 :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선포한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되 잠잠하라. 고요하라.(입을 다물라, 침묵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리다.) 특히 ‘잠잠하라’(시오파) 바람을 향한 현재진행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라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페피모스)’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 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대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5장 1절에서 20절 군대 귀신을 쫒아내심을 통하여 주님이 영적인 세계의 통치자이심을 보여준다.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엄밀히 따져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심을 고백한다.

 

5장 21절에서 34절에서는 혈루병자 병를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크셨지만 육체의 구원에 대해서는 간과하시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치료가 아니라 근원적인 치료를 해주신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 깨달으니라.” 예수님 이런 능력행사에 있어서 판단 기준이 믿음이 된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다. 34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예수님은 전인적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신다.

 

5장 35절에서 43절에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다. 여기에서 예수님 인간의 죽음의 문제 해결의 근원이 되심을 선포한다. 예수님은 소녀가 잔다 말씀하신다. 그리고 들어거셔셔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명하신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으로 오실 것임을 우리에게 확증하신다.

 

이상의 네 가지 기적을 장, 절 분리한 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한 덩어리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자연적 질서와 영적인 세계의 지배자이심과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시여 병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을 알 수 있다. 주님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

본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가셨다. 배로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정확히 도착한 때가 아침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도착 지점은 일반적인 길이며 거러사 지방이었으며 현재의 케르사나 코우르시라는 이름이 보존된 한 고을과 관련되어 있다. 케르사 근처에는 해안선이 평평하고 무덤이 없다. 그러나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더 내려 가면 해안선으로부터 40미터쯤 되는 곳에 가파른 지형이 있고 거기에서 3킬로미터 쯤 되는 곳에 사라밍 거주한 듯한 동굴 무덤이 있다.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근처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는 유대 관습에 무덤이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힘이 너무 세어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밧줄로도 되지 않아 쇠사슬과 쇠고랑으로도 그를 매놓을 수 없었다. 문제는 소리지르며 제 자신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산과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고통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해변에 상륙한 예수님에게 달려와 절하였다. 그는 보통 격분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달려갔지만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품고 달려갔다. 그리스도를 보자 일시적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벋어나게 되었다. 그는 큰 소리로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말한다. 이는 “어찌하여 당신은 나의 일에 간섭하십니까?” “나를 버려두고 네 일이나 신경써라” 그냥 내 버려두십시오 란 말이다. 예수님은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그 영혼에 대한 긍휼하심으로 명령하신다. “더러운 귀신이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런 뒤에 그리스도는 그를 구하기 위해 권세를 나타내셨다.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자 그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라’ 레게온은 로마군 단위로 4천에서 6천명 가량된다. 이 표현은 대항할 수 없는 강대한 세력을 가진 조직임을 말한다. 아마 상당한 마귀들이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대답하는 이는 그들의 수장으로 보인다. 사단은 그 곳을 떠나지 않도록 거듭 간청한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산 곁에서 돼지 때가 먹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귀신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지를 간청하였고 예수님은 허락하셨다. 귀신들은 환자에게 떠나 새로운 점유물인 다수의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이로 돼지 떼는 비탈로 줄달음을 쳐 내려갔고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몰사하였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여 읍내와 그 읍내 주변에 있는 촌에 급히 달려가 돼지 떼의 손실을 고하였다. 그들이 왔을 때 놀라운 일을 보게 된다. 귀신들린 사람이 단정히 옷을 입고 바른 모습으로 앉아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뒤 흥분된 격론이 있고 그 곳 주민들은 예수님을 불안을 주는 대상으로 생각하여 떠나기를 간청한다. 대조적으로 귀신들렸다가 치유된 사람은 예수께 충성을 표시한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니 그 사람이 따르기를 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지 않으시고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권고하신다. 치유를 통하여 가족 공동체의 회복을 바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신들린 사람이 데가볼리로 돌아가거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전파하게 된다. 아마 기쁨에 찬 복음을 전하였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일이었다. 이방의 땅에도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다.

 

본문의 내용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첫째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계된 부분이다.

귀신의 하는 일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은 인간이 간직한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거나 파괴하기 위함이다. 8절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예수께서 구신을 향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신 것은 그 사람의 본래적인 품성과 인격으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로 주관,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님의 주권이 인정되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현장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찬조 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 입은 영혼들의 건강하고도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예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죄인도 구원하신다. 이렇게 하여 구원된 자는 새 마음이 주어지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을 변화케 하고 개조하는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람을 악마의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하여 중생케 하시는 일이다.

 

둘째는 이 사건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권능에 놀라 배척했다. 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것이었다. 불쌍한 병자의 고침, 한 영혼의 구원보다는 돼지 떼의 몰사 사건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경제적 가치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기적을 두려워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이성으로 받아들이기에 많이 힘들 수 있다. 불신앙은 완악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는 기적이 상식이 되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구원된 이 사람은 주님을 존경하며 떠나지를 못하고 함께 있기를 간구한다. 은혜를 받고 권능을 경험하면 그곳을 떠나지 싫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마리아는 여러 가지 일거리가 있음에도 말씀 듣는 일에만 전념했다. 은혜의 자리는 정말 떠나기 싫다. 늘 그곳을 사모한다.

 

셋째는 주님은 증인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간청을 물리치신다. 그를 가족과 친척들에게 증인으로서 보내셨다. 봉사(전도)는 구원된 자의 행할 바 의무이다. 특히 가족이라든가, 친족사이에 증거 하는 것은 크게 필요하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함께 가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가서 고하라’고 하셨다. 어느 것이든 우리들은 주의 뜻대로 놓여진 입장에 따라서 좋은 증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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