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어저나 2009. 4. 19. 21:24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막 5 : 21 ~ 24, 35 ~ 43 ( 2009. 1. 25)

 

야이로의 딸의 치유의 이적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간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의 치유가 있다. 이같이 두 기사가 밀착된 이유는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하여 가는 길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이중적 이적에는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심으로 이미 사망한 그 소녀의 놀라운 치유를 예상하게 한 사건이었다.(마가의 서술 기법)

 

에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이미 예수님을 기다리며 물려와 있었다. 이때 관심이 야이로에게 집중된다. 그는 예수님께 간청한다. 자기의 딸이 곧 죽게 되었는데 그 위에 손을 얹어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 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에서는 회당장(눅 8:41; 행 18:8,17)과 부회당장격인 핫잔(hazzan)이 행정과 집회 인도를 랍비(rabbi)가 교육을 담당한다. 그리고 평신도도 구성원이었다.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의 순서와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를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실추로 인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들이다. 당시 회당장은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최대의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

 

회당장 딸에게 가는 중 혈루증 여인의 치유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시간의 지체가 소녀에게 치명적이 것이 되고 만다. 집에서 달려온 일행이 회당장에게 그의 딸이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에게 괴로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일러 주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저희 말을 들으시고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그리고는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자기 딸을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셨다.

 

집에 당도하니 예수님은 이미 장례가 준비 되고 있음을 보셨다. 애곡의 노래가 불리워지고 있었다. 애곡의 노래는 제창과 손뼉을 치며 부르는 교창으로 되어 있다. 아주 가난한 삶도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에도 최소한의 규모로 피리 부는 사람 둘과 전문적으로 애곡하는 한 사람을 고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회당장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고 보니 많은 수의 사람을 고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애곡하는 사람을 보내시고는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라고 책망하시고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포하신다.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상태를 말하고, ‘심히 통곡함’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혼란함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물려 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녀가 아직 절대로 못 돌아올 상태의 죽음의 영역으로 완전히 건너가지 않았음을 나타내신다. 그 소녀가 즉시 깨어날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애곡이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애곡하는 자들은 그 소녀가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웃었다. 통곡과 눈물이 쉽게 비웃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그 풍습이 형식적이고 인위적인가를 말해 준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들은 물리친 후 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만 대동하고 그 방안으로 들어가신다. 소녀의 손을 잡으신 후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소녀는 일어나 걸었다.

예수님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남에게 전하지 말라고 엄히 분부하셨다. 침묵하라고 명령하신 각별한 이유는 조소로 예수님을 경멸한 자들의 불신앙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나 부모에게 돌아온 구원의 행위를 증거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무리에게는 계속 비밀에 부칠 것을 지시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지시를 무제한으로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다. 그 아이가 공중 앞에 나타나면 사실 그 자체가 스스로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의 예수님 의도의 성취이다. 예수님이 그 자리를 빨리 뜨시므로 외적 찬양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외적 찬양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 받는 것 보다 한 영혼의 구원을 더 기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의 성취와 주님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가 물러가심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소리 없이 그 장소를 떠나셨다. 또 흥분과 혼란 속에서도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마가의 끝맺음은 참으로 인정이 넘쳐 있다. 야이로의 딸이 다시 소생하므로 나타난 의미는 사망과 불신앙이 결합함에 대한 이것을 극복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의 표시이다. 이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리의 구속과 실재가 명시되었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행되는 기적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면 한다.

 

첫째,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다. 이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 실로 예수님은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나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를 떨쳐버리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참 용기요 참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둘째,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달리다굼”(탈리타 쿰) 이 말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된 말이다. ‘탈리타’(소녀라는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로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이 말은 사실감과 현장성을 더해 준다. 그래서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령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이를 깨우는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과 부활의 새 지평을 예수님께서 여셨다. 주님은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굽’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넷째,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귀신에 눌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점과(10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한 것은 그 일이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신성은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다섯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는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또 예수님은 이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아이가 몹시 아파있는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 것까지 제공하시는 예수님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진정 예수님은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 이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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