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평가

어저나 2009. 4. 19. 21:42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평가 (눅6:14-15) (2009 2. 4)

 

제자 파송을 통한 적극적인 예수님의 선교 결과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 당시 갈릴리와 뵈레아의 분본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풍문들이 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헤롯 안디바는 헤롯 대왕과 말타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는 그의 유언대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수투스)에 의해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마2:22)에게 북부 이두매와 슈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하게 하고, 다른 아들인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주었으며, 요단 건너 헤르몬 산에서부터 야르묵 강 사이는 또 다른 아들 빌립 (마14:3)에게 주었는데 아켈라오에게는 왕의 칭호 대신 군주란 이름을 주었다. 이리하여 아켈라오는 10년간(BC4-AD6)통치한 후 로마 황제의 의심을 받아 폐위되고 그곳은 황제의 직속 총독이 다스렸다. 한편 안디바는 AD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빌립은 AD34년까지 그에게 주어진 지역의 분봉왕으로 다스렸다.

헤롯 안디바는 그가 빌립(헤롯 대왕의 아들, 헤로디아의 숙주, 분봉왕 빌립과는 동명이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헤롯의 형수)와 결혼했고, 조상 때부터 공동묘지인 디베랴를 수도의 위치로 선정하였기에 유대인들이 수도권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신망을 받지 못했다. 칼리굴라(로마의 황제)는 안디바에게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왕의 칭호를 정식으로 요구하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공식적 지위에서 해직되었으며 39년에는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가는 지역적 상례를 따라 왕실 칭호를 따랐다.

 

14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헤롯왕의 반응이 나온다. 15절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나온다. 3가지 반응이 나온다.

 

첫째는, 헤롯의 반응이다.

헤롯은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선지자라고 대중들은 그렇게 우르로 보았다. 헤롯은 자기 영토 내에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예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선지자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헤롯이 더 두려워 한 것 같다. 다음 설교에 알겠지만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부활이라고 하는 확신은 예수님과 요한과 아무런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요한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또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받으셨음을 듣기만 했어도 동일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 예수님을 엘리야와 동일시했다.

이 견해는 세례 요한이 1장 7절에 말한 바대로 “장차 오실 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 확신이 준 영향일 것이다. 비록 요한이 자기보다 큰 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지목하지 않았지만 말라기 3장 1절, 4장 5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예언자 말씀에 약속된 것을 말한 것을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셋째는, 일반적인 예언자로 보았다.

예수님을 불길한 종말의 징조인 엘리야가 아니라 일반적인 예언자로 주장함으로써 두 번째 평가와 구별된다. 이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하나의 예언자 계보에 추가하는 격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걸로 볼 때 이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늘 옆에서 동행하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으며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야 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이 우리 곁에 있지만 그 주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사이지만 늘 자신을 반추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무얼 말씀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건 아닌지 깊게 생각게 한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의 심리 상태를 통하여 지금 시대의 심리 상태를 발견하고자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간 본성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을 지난 말씀에서 보았다. 잘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인할 가능성이 더 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고 배우고 있다. 이성의 작용을 신봉하여 조화로운 믿음의 세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믿음의 본질은 역사하는 힘이 있다. 지금 현실로 볼 때 과연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까라는 의구심이 많이 든다. 철저한 헌신, 순종이 사라져 가도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할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헤롯의 마음 상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불안 심리와 죄책감이다.

헤롯은 자신의 비윤리적 행동을 비판한 세례요한을 죽인 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다. 그르던 중 세례 요한이 예수 안에서 되살아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범죄자는 심리 상태가 늘 불안하다. 항상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과 결부 시켜 생각하거나 큰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경우가 많다.

16절에서 “내가 목배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에서 아마 신하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으리라 생각되나 정작 헤롯 자신이 직접 ‘내가 목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직접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세례 요한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이 예수님이 부활한 세례 요한 일 것이라고 단정하게 했다.

피해의식, 양심의 가책은 인간 본성에 기저에 존재하며 인간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것의 결과로 자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범죄로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이다. 일본의 ‘묻지마 살인’ 미국의 하교 총기 난사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의 궁극적인 치유책은 예수님 만남을 통한 치유이다. 감싸고 싸매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의 정신만이 궁극적 문제의 해결이라 믿어진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분노와 피해의식 이런 쓴 뿌리들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정갈하게 씻겨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둘째, 헤롯의 잘못된 종교관이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활동한다는 헤롯의 말이 흥미롭다. 이것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윤회설과 비슷하다. 이로 보건데 당시에는 영혼 불멸 사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독교도 영혼 불멸 사상을 믿는다. 하지만 죽은 영혼이 되살아나 다시 역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나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아니 기독교의 많은 이단들도 자신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다 불발로 끝났다.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이 대표적이다.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 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대표적인 것들이 베레아 집단의 귀신론이다. 김기동의 귀신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귀신을 물리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원래 원한과 한이 있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세상을 떠돌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면 그 몸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고 병이 된다는 것이다. 귀신 박멸은 그 병에 대한 치유로 결국 영혼의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세상을 떠돌아다니지 않는다.

또 하나는 ‘가계저주론’의 위험성이다. 조상의 영이 계속 그 가정에 머물며 그 가장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생각이다. 조상의 저주 그가 예수 믿지 않음이 후대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그 속에서 벗어나 믿음의 가장을 꾸리고 믿음의 삶을 살므로 악한 영들의 메임에서 풀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확대하여 그 가정의 조상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론적인 의식행위를 하는 것은 주술적인 것이라 보여진다. 이것은 무당들이 하는 일이나 같은 일이다. 이런 영매들의 활동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TV에서도 공개적으로 영매들의 활동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들이 혼란한 시대를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 분별의 영을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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