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에바다의 능력

어저나 2009. 4. 19. 21:43

에바다의 능력 (막 7 : 31 ~ 37) (2009. 4. 15)

 

오늘 본문도 치유의 장면입니다. 마가복음을 강해하면서 치유의 현장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다른 치유와 다르게 ‘침’과 직접 손가락을 사용하여 치유하고 계십니다. 이와 유사한 기사는 요한복음 9장에 보이지 않는 자에게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는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눈먼 자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안수하심으로, 죄 사함을 선언하시므로 병자를 일으켰습니다. 그른데 의학이 발달한 현대인이 보기에 신기롭게 보이지 그 시대 사람들에는 별로 신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어른들이 상처가 나면 침을 바르라고 했어 침을 상처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벌레에 물렸을 때, 다리가 저리면 코에 침을 발랐습니다. 실제 효과도 있었습니다. 침은 소독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죠, 음식물을 소화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또 음식물을 먹을 때 꼭 꼭 씹으면 면역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뇌 기능을 활성화하여 기억력을 좋게 합니다. 노인성 치매를 예방할 수도 있답니다. 얼굴 근육이 발달해 표정이 풍부하고 매력적으로 바뀌게 한답니다. 침에는 젋어지는 호르몬이 파로틴이 있어 건강하고 장수하게 합니다. 음식물을 꼭 꼭 씹으면 정말 좋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침’이 병을 고치는데 유용한 도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침을 발라 기도하시는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 자체보다는 예수님 말씀의 권능에 주목해야 합니다. 의식이 치료를 가져오게 한 것이 아니라 ‘에바다’ ‘열려라’ 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심으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졌다는 것입니다.

 

문제시되는 것은 행위의 강조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그런 행위를 가지고 병자를 고치려는 것의 많은 문제를 교회사를 통해서나 매스컴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죽은 남편을 방에 두고 일 년 씩이나 시체를 닦아주고 기도하면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찰서에서 믿지 않는 경찰관을 향하여 항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신뢰성을 증가시키려고 하셨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바다’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 가치관, 세계관이 바뀌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 나가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하면서 말씀 속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열림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1. 일하는 방법에 있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병자를 고치실 때 말씀으로 명령하심, 안수하심, 멀리 있는 병자를 위한 선포하심,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은 혹 내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두렵습니다. 오히려 지식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한다면 ‘에바다’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자리를 내가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경건의 시간,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근대의 전쟁에 관한 영화를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서서 북을 울리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총알과 포탄이 날라와도 계속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겁니다. 군에서 포복과 은폐, 엄폐를 배운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근데 새로운 방식을 만든 이는 프러시아의 몰트케 중위였습니다. 그가 포복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문합니다. 대학 입시에도 ‘사정관 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살 때 많은 기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정도는 전화 받고 걸고, 문자하고, 전화번호부 등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많이 팔리는 기종은 복잡하고 많은 기능을 가진 것을 구매합니다. 작은 책 하나 설명서 딸린 휴대폰을 삽니다. ‘역설’입니다. 현대사회는 갈수록 복잡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잡한 것을 싫어 하면서도 다양한 기능이 있는 제품을 구매한다는 말입니다. 자동차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의 차가 외부의 모양과 크기에 치중할 때 우리나라와 일본은 다양한 기능을 개발하여 미국 자동차를 제치고 시장을 점령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단순화시키고 내용을 충실하게 보완시켜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생각 밖에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세미나가 많나 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의 변화는 큰 바람으로 이어져 말 할 수 없는 큰 역사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대상에서도 열려야 합니다.

복음은 유대인, 헬라인,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자에게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20·20 비전에서도 우리는 모든 자에게 복음을 들고 나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값비싼 보화입니다. 진주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살 만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가 없이 받은 것은 값없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그냥 주니까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널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과 여러 사람과의 교류를 통하여 복음의 증진을 내세워야 합니다. 지금의 전도 방식은 외치거나 전도지를 통한 전도의 시대는 지나고 있다고 봅니다. 관계전도입니다. 그 사람의 필요성을 충족시킴으로서 서로의 마음이 열려 질 때 복음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 파고 들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진주 선물하기’ 이것은 그 사람에게 값진 것을 먼저 내어주라는 말입니다. 닫힌 모임이 아니라 열린 모임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마지못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친구의 요청에 못 이겨서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귀먹고 어눌한 자가 왔을 때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왔지만 주님의 능력을 사모했을 겁니다. 그랬기에 낮고 난 다음 많은 사람에게 증거했습니다.

 

3. 진실함이 전파의 지름길입니다.

거짓도 낱낱이 밝혀지듯이 진실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말하지 말라 하여도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나면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실함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음으로 응답했고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는 순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불신’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적이 ‘불신’입니다. 저도 인적으로 불신의 삶을 살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진실하게 말한다 해도 아무 것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문제에 있어서도 불신은 이혼으로 파경으로 치 닫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아멘

‘에바다’는 능력 있는 주님의 외침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감소하고 교회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하지만 복음을 능력을 바래는 사람은 계속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교회에 나갈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기다라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바다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치유하며 마음을 달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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