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어저나 2009. 5. 2. 12:24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막 8 : 11 ~ 13) (2009. 5. 3)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이 글을 쓰거나 학술 논문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의 정의’입니다. 어휘에 대한 정확한 해설로 개념을 정립하고 자기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글을 써내려갑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그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가 쓰고 있는 어휘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물론 전체적은 상황 안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자주 쓰여 지는 말들로 표현되어집니다.

 

이번 주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가복음 8장을 묵상하던 중 ‘표적’이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이제까지 표적과 이적과 기사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각 각의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R. C. 트렌치(1807~86 영국의 신약학자)는 ‘기사’는 어떤 일에 의해 생겨난 사건을 목격한 자의 놀라움을 포함한다. 마가복음의 중풍병자의 치유했을 때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풍랑을 꾸짖으심으로 제자들의 놀라는 모습,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심으로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목격자들이 꿈꾸는 듯 한 몽롱한 상태에서 불러내기 위하여 행해진 것으로 그것 자체로서는 사람의 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여 지게 될 영적인 일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적(기적)’과 ‘표적’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적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적이란 이미 알려져 있는 바의 자연법칙에 어긋나 있는 듯한 방법으로 생겨지는 사건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적은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을 ‘이적’ 또는 ‘기적’이라 말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예수님의 신성과 놀라우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하십니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적을 통하여 표적을 나타내실 때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에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하리이다.”(출 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드시고 모세의 손을 문둥병이 들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시며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마귀들을 쫒아내는 것, 독을 마셔도 해를 당하지 않는 것, 병자들을 안수하였을 때 치유하는 일 등 이것들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전하는 것이 진리임을 증거 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들입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도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안식을 표적이라 부리고 있습니다. 에스겔 20장 20절 “또 나의 안식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은 치유의 표적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때에 소경이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 ~6) “내가 잃어버린 자들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들을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으리라.”(겔 34:16) 이 말씀들이 예수님의 오실 것을 예언하며 와서 행한 일들을 말히고 있으며 실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표적은 주장이나 행동이 진실성을 지니고 있느냐 정당성을 지니고 있느냐를 분별할 수 있는 표시입니다. 표적은 분명 잠시 후에 성취될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은 앞에서 말한 예언과 실제의 결과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는 모두 표적입니다. 말의 신실성이나 성취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야이며 확실한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악마적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에게 계속하여 하여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증명하라는 요구이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권세로’(막11:28) 집요하게 추궁하며 질문합니다.

 

표적의 요구의 배후에는 예수님의 권세가 악마적이며 그의 역사는 흑색마술이라는 완고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깊은 탄식으로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표시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의 질문 속에는 절망의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배를 따고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거부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불신앙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욕되게 만들기 위함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 13절 말씀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하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으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오늘의 현실 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우리가 읽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적과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표적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더 이상의 표적의 요구는 우리를 불신앙의 길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존재의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정말로 부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바리새인의 길을 걸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말씀하신대로 만 산다면 완전한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우리를 혼란의 길로 들일 수도 있습니다. 전 요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의료선교가 선교 방법 중에 가장 좋게 보입니다. 물론 교육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유의 손길은 예수님의 손길인 것 같습니다.

 

헌신의 삶, 열정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란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삶으로 예수를 증거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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