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와 개신교 유적탐방기

애락원 원장 플렛쳐 박사 추모비

어저나 2009. 4. 29. 12:24

 

  고3때 새로운 짝을 만났는데 나보다 한 살 많은 복학생이었다. 얼굴이 창백하였고 너무 하얗고 마른 학생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병이 있었고 학교에도 자주 결석하였다. 시간이 지나 친구처럼 지냈는데 4월 어느 날 부터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휴학했다는 사실을 앍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이 담인 선생님이었는데 시인이셨다. 그 때 ‘김소월’ ‘김영랑’ ‘청록파 시인들’ ‘윤동주’ ‘이육사’ ‘서정주’ 한국의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어느 날 나에게 ‘한하운’이라는 시인의 시를 소개해 주었다. 첫 시가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개구리’였다 너무 재미있었고, 그리고는 ‘파랑새’ ‘보리피리’를 알려 주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도 가도 황톳 길’이란 책을 읽고서 한하운의 삶에 대해서 알게되었다.

 

 아련한 향수라 할까? 그는 ‘나환자(문둥병자)’였었다. 그의 사랑을 노래한 ‘리라꽃 던지고’을 읽고서는 눈물이 고이기도 했었다. 시인이 여생을 보낸 ‘소록도’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의 동료들이 살고 있는 ‘애락원’을 방문하면서 다시 열아홉짜리 한 소년을 다시 만난다.

 

 애락원은 동산의료원 2대 원장이셨던 플랫처(Archibald. G. Fletcher)원장이 1913년 사회구제활동을 위한 시설로 설립된 것으로 당시 만연한 나병 퇴치와 나환자 진료를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는 조선 147개의 교회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의료 선교에 큰 빛을 남기신 분이었다.(밑에 그의 추모비 전문을 실었다.)

 

 한 때 1000 여명이 살았다는 이곳은 지금은 너무 조용하였다. 현재 30여 명이 안 되는 나환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대부분 고령이었다. 그 넓은 땅위에 덩그라니 건물들만 있었고 사람의 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더 이상 나병이 발병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의료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플렛쳐원장 공적비(뒤 에락교회가 보인다)

 

 

송은각(애락원 원장실)

                                             

 

애락원 전경

 

 

별이추(플렛쳐) 원장 추모 공적비 내용

 

한국 나병사업의 선구자요 나병환자의 은인인 에이. 지. 플레쳐 박사는 1882년 8월 16일 카나다에서 출생하시다. 27세시에 선교사로 한국에 오셔서 평북 선천 지방 순회 선교사로 시무하시다 의료 선교에 뜻을 두고 대구에 오시어 1910년에 대구동산병원을 창설하시다.(각주: 동산의료원은 제중원이 모체이고 제중원 설립자는죤슨박사님이다). 60년 전 대구에는 아직 근대화된 의료시설이 없는 때이므로 수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오니 그는 환자 진료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야말로 고향에서 쫒김을 당한 나병환자들은 정처없이 거리와 골목을 헤매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 애절한 상황을 보시고 사재를 털어 초가삼간 집을 구입하시어 우선 환자 20명을 수용하여(1913. 3. 1) 나병환자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대구 나병원의 기원이다. 그는 나병원을 확장하기 위해 대구 구라 협회와 미국에 호소하니 기금조달이 됨으로 현 위치에 병사를 건축하고 80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져 입원을 희망하는 환자가 증가하므로 전후 9회에 걸친 예배당을 위시하여 병사 진료실을 건축함으로 580명의 수용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매일 한 번 씩 애락원에 나오셔서 손수 환자진료에 여념이 없었으며 주일에는 자신이 몸소 나오셔서 설교를 하시고 육체의 병보다 심령의 병을 고쳐야 한다고 방방이 찾아다니시며 예배당에 나오기를 격려하셨다. 예배당에 나오다가 엎드러져 죽으면 천당에 직행한다는 농담섞인 권고를 곧잘 하셨다. 그는 환자, 건물, 나무를 사랑하여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피치 못할 불운이 닥쳐왔으니 즉 태평양 전쟁이다. 1942년 6월 2일 새벽 3시에 강제송환으로 떠나기 싫은 정든 애락원을 등지고 미국에 가셔서 다시올 기회만 기다리다가 해방후에 한국에 오셔서 얼마동안 선교사업을 하셨으며 다시 본국에 돌아가서 고적한 여생을 보내시다가 1970년 6월 7일에 미국 켈리포니아주에서 하나님 나라에 불리워 갔으니 그는 실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장 3절)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만나 준비하신 면류관을 받었을줄 확신한다.

 

굳센 믿음과 강인한 투병정신을 이어 받은 원생들은 사회복지란 개선 행렬에 발걸음을 옮기면서 감사한 뜻에 한푹을 이 작은 돌위에 새겨둔다.

 

주후 1971년 7월 30일 세움

대구 애락 보건원생 일동

목사 김종은 지음

윤훈숙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