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예수님의 파토스(Pathos)

어저나 2009. 6. 20. 09:26

예수님의 파토스 (막 1 : 40 ~ 45)                           (2009. 6. 21)


하나님, 하느님 어감 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이는 단어입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와 개신교회 중에는 기독교장로회 신학자 중에 일부가 하느님을 쓰고 있고,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 +님 이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으로 교육받아왔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며 우리가 고백하는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만물의 중심이 되시는 참된 하나님이라면 이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배타적이라 말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단어의 문제로 하나님의 모습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소불위(無所不爲)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함이 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꿈, 이상, 예언 등 다양한 방법을 들어 자신의 사랑을 들어내셨습니다. 하지만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면 잠시 하나님께로 돌아섰다가, 어려움이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또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을 말씀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악 속에 거하면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의 역사는 ‘은혜 -타락 - 심판 - 구원’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보이셨습니다.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고 자신의 죄악을 벗어버리면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가장 쉽게 구원의 길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자라게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자라며 열매 맺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분 부분만을 보고 있습니다. 간혹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의 범위 내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있으며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지식, 경험, 사상 등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인간의 말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 대목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혈기 완성하고 지식의 욕구가 충만했을 때 밤새우며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벌일 때가 있었습니다. 전 이것이 부질없는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다양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것을 통하여 많은 것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논쟁이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인격을 상하게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밖의 한계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방법이 구체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00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이 방법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이 ‘파토스(pathos)’입니다. ‘열정’ ‘열심’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전 이 말을 처음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정, 열심 이 말을 하나님에게 대입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히 사용하지 못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나 쓰는 말을 감히 하나님의 마음에 대입하는 것이 큰 잘못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고민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파토스를 읽게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파토스(pathos)란 말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정열’ ‘열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는 인간을 너무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린 그 사랑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부분을 다 드려서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성경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영화한 것입니다. 성경의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을 영화로 볼 때 너무 끔찍했으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고통스러운 쓴 잔을 마시어야 했는가?’ ‘이 방법 외에는 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는가?’ ‘왜 전지전능하신 당신이여여만 했는가?’ 수많은 생각이 어지럽게 떠오르며 내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열심’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하나님, 물과 피를 다 흘려 인간의 고통을 통하여 인간 구원의 완성을 일구어 내신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열정은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은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는 고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길이 따르겠지만 그 길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기에 두려움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CBS에 밤 늦게 ‘박종호의 가스펠 아워’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생명수가 넘치고 각종 과실이 열매를 맺고 찬송과 예배의 소리가 울려 퍼지며 축복의 노래가 넘실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지옥은 유황불이 있으며 고통의 소리가 아비귀환을 이루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들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 지옥에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근데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각종 과실과 축복과 좋은 집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요지는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때문에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리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지옥에 하나님이 계시다며는 지옥에 갈 수 있느냐? 라고 되 물으셨습니다. 상당히 극단적인 질문임을 전제하셨지만 과연 지옥의 고통을 알고 있는 우리는 쉽게 동의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순간 당혹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가? 라는 현실적인 물음이었기에 힘들어 졌습니다.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 어느 곳에 계시든 간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 든 가야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된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외부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과 편리함을 추구해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며 하나님이 계신 곳이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본향임을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애끊다’ -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파토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측은히 여기시고’의 그리스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말은 ‘창자,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동사형입니다. 우리말에도 이 말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 데 그것은 ‘애끊다’입니다. 경상도에서는 보통 애간장이 탄다는 말과 같습니다.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 창자가 다 녹아지는 것 같다.’란 말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이 말을 자주 듣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되고 난 다음에 실지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준서가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탈장’으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간난 아기에게 링거를 꼽을 때 핏줄을 찾지 못해 머리에 링거를 꼽았을 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했습니다. 수술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1시간 정도였습니다. 병상에 있는 짧은 하루였지만 아이의 침상에는 ‘금식’이란 말이 붙어있었습니다. 젖는 빨지 못하는 간난 아기를 보면서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신 마취를 했습니다. 수술실에는 엄마가 보는 가운데 마취를 하고 깨어날 때 엄마가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애간장이 타 들어갔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제 보다 더 했겠지요. 부모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 준서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지만 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기도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부모님들의 속을 많이도 타게 했지요. 어른들이 어버이가 되어야지 어른이 된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애끊다’ 이 말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부디 부모님의 속을 태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저는 이제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돌아다보면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청개구리’처럼 잃고 난 다음에 소중함을 늘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마지막 가야기독병원에 계실 때 노환으로 인공호흡에 의지하고 있을 때 다른 식구들에게 잘 웃지도 않으시고 표정이 없으신 어머니가 제가 같이 잔 그날은 몇 번이고 저를 보시며 빙그레 웃음 지어 주셨습니다. 누나들은 그것을 보고는 아들이 그리 좋은가 보다 하며 말을 건넸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추운 겨울 얼음물에 목욕하시면서 정성을 들이신 어머니 마음은 아버지가 되고 한 교회의 목사가 되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저는 어릴 때 평생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는 아들이 될 수 있다 자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랐습니다. 저도 부모님의 애를 끓게 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썩이지 않고 산다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파토스를 알 것 같습니다. 나환자(문둥병자)를 보시고는 ‘측은히 여기시고’ 마음 깊이 그들의 아픔을 알아내시고는 그들과 고통을 같이 하신 것입니다.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고 창자가 끊어지는 그런 아픔을 가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육이 아니고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냥 불쌍해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보았을 텐 데  예수님은 혈육과 같이 대하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어버이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구절절한 사랑을 드려내 보이셨습니다. 누가 그리 쉽게 부정하고 불결한 그들의 손을 만지려 했겠습니까? 진물 나고 썩어지는 몸을 보고 싸매시고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셨겠습니까? 사람들은 ‘슈바이처’를 성자라 부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성자는 인간의 무지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우성학적으로 사람을 대우하는 아주 나쁜 우월의식이 성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인들을 돌보는 수많은 성자들이 있습니다. 사회운동과 NGO단체들도 너무 많이 있으며 목숨을 바쳐 가면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인간 사랑의 마음인 파토스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파토스는 있습니다. 그것이 생활 속에서 실현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마음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파토스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드러내며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널리 펼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전도)는 예수님의 애끊는 마음(파토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열기는 잠시 타오르다가 멈추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모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참된 사랑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난생 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 마음을 가지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과 배타적 사고방식을 다 뛰어 넘어 그 사람만 집중하시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시며 그의 마음의 문제 죄악을 사해주시면서 그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당당한 그 사회의 일원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애를 입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지금 당장 오셔서 이 자리에서 눈을 만지시고 시신경을 회복시키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는 권리들이 회복되어지며 사람으로 온전한 구원이 이 시간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장벽들이 허물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제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는 장벽이 있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듯이 저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정신을 힘들게 하는 가시가 있습니다. 저는 온전한 치유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뿐 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가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회복되는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안에 예수님의 열심과 열정이 이런 모든 문제를 변화시키며 완전히 회복될 그날이 바로 거룩한 심판의 날인 하나님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날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며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차별도 아픔도 없을 것이며 기쁨과 사랑이 충만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 “그러니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셨다.” 6장 34절 “그래서 그분은 (배에서) 내리면서 큰 군중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8장 2절 “군중이 측은합니다. 그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는데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끊다’가 나오는 세 구절입니다. 모든 상황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장 천시 받던 나병환자들 지날 때 마다 불결하다 불결하다고 외쳐야만 했던 사람들, 목자 없는 양 때처럼 꼴 찾아 생명의 말씀을 찾아 유랑하던 무리들(오클로스, 민중) 배고프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사흘이나 함께 했던 불쌍하고 힘없는 자들 이들에게 예수님은 애끊는 마음을 가지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먹이시며 심령의 병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애끊는 마음을 주셨다면 우리도 사회의 질병을 사회적 차별을 육신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만 치유할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가족, 이웃, 민족, 열방을 치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완전한 사회적 회복을 주신 예수님

예수님의 파토스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병환자의 사회적 차별의 문제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재관에게 가서 정해진 절차를 거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율례를 따라 제사장에게 자신의 정결케 됨을 확인하고 이제 완전한 자유인임을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쁜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세요. 하나님은 당신 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파토스는 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시고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파토스를 통하여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 삶을 온전히 인정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겉으로 상냥한 웃음으로 대하면서 속으로 비아냥거리는 이중적 태도를 버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삶입니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명령이며 사명임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인간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들도 그러한 사랑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과 같이 뜨거운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신 예수님은 우리 또한 사랑의 사람으로 바꿀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