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어저나 2009. 6. 26. 15:44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 : 1 ~ 14)  (2009. 6. 28)


만화는 재미있습니다. 목사님이 만화를 좋아한다구요? 예 좋아합니다. 어릴 때 10원 주면  만화가게에서 TV도 보고 김 일 선수 나오면 박치기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있다가 혼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우주소년 ‘아톰’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태권 V, 마루치 아라치, 도깨비감투, 중학생이 되었을 때 ‘캔디’ 이루 헤아릴 수 없네요. 아마 시대는 바뀌어도 여전히 다들 보고 있지요. 요즘은 칼라에다 3D 입체적이라 만화가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월트 디지니는 캐릭터로 문화 상품 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희 집에도 만화가 제법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문열의 ‘만화 삼국지’ ‘Why’ ‘먼 나라 이웃나라’ 최근에는 이원복 교수의 만화 한국사, 세계사도 구입해 놓고 있습니다. 준서와 준하는 간혹 만화 삼매경에 빠집니다. 그 중에 교회에서 선물해 준 ‘파워 바이블’을 다른 책에 비해서 많이 애독하고 있습니다. 저도 간혹 읽는데 성경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잘 서술해 놓았더라고요. 간혹 한 번씩 보다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만날 때 마치 ‘광맥’을 만난 듯 굉장히 기쁩니다. 이번에 우연히 준하가 보다가 쇼파에 던져진 6권 ‘멸망과 약속’을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좌절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구약에서는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족보가 나오는 데가 되면 누가 누군지 잘 구분하기 힘듭니다. 이 부분에 가면 한계를 발견하고 성경을 덮는 것 같습니다. 선지서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선지서를 제대로 이해할 려면 그 시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지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 선지서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면서도 많이 읽혀지지 않는 책인 것 같습니다. 성도님에게 물어보면 성경을 1독 하신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파워 바이블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간혹 ‘나훔’ ‘오바댜’ 이런 부분을 찾으라 하면 찾지 못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말라기는 많이들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하면 다들 말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아시는 분은 잘 없고 대부분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인용하는 본문이라 주보에 말라기 본문이 실리면 이번 주 설교는 십일조에 관한 설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라기는 십일조 내면 복 받고 안내면 핍박과 혼란을 받는다는 것이 중심 내용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억지로 남의 눈치를 보고 드리는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환경

말라기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어느 선지자(아마 에스라)를 가리키는 직임일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선지서에도, 소선지서에도, 전부 개인의 이름이 표제가 되어 있는데, 하필 이 책만 예외로 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아, 역시 개인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말라기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 또 어떤 인물이었는가는 말라기서의 내용으로부터 짐작하는 외에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당시는 “총독, 헬라어로 폐하”(말 1:8)에 의해 에루살렘이 통치되었으므로 바사(페르시아)의 속국 시대였음을 알 수 습니다. 또 성전은 이미 재건되어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을 때입니다(말 1:10,3:1). 이것으로부터도 학개, 스가랴 시대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제사장의 타락, 이방인과의 잡혼, 이스라엘 사람의 당연한 의무인 십일조 헌물을 게을리 하는 것 등의 죄를 책망하고 있는데, 특히 이반인과의 잡혼, 십일조에 대한 문제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생겼으므로 그들이 극력 개혁하려고 노력했습니다.(스 9:2,10:36,44, 느 13:10, 28). 이런 점으로 보아 말라기서에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BC 440- 410 년경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한탄

에스라와 느혜미아의 사역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행복한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은 페르시아(바사)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고달픈 삶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관리들의 착취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자를 갚지 못하면 그들의 소유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동족에게는 이자를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 22:25)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황에서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의 음성은 끈이질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지지 않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올바른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불평과 고통의 연속,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말라기(나의 사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백성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외치었습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백성 중에는 “하나님은 자녀들을 고통 속에 몰아놓고 즐기는 분인가 보군요.”라는 말도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하나님께서는 에서보다 야곱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자손입니다.”라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원래 구원 밖의 사람이었고 불순종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선택받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이기뻐하시지 않는 이방인들의 신상을 섬기는 일이 있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시대적 환경, 문화적 환경, 정치적 환경에 눌려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우상들에게 드려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거두어 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축복과 저주는 자신의 삶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은혜를 민족적으로 받았지만 개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삶의 결과는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고통 받는 참된 이유를 모른 채 변명을 늘여 놓습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어도 꼬박 꼬박 하나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렸습니다.” “굶을지언정 예물을 드렸습니다,” 라고 선지자에게 대항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변명에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신들이 바치는 예물이 온전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초태생이고 흠 없는 것 아름다운 향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신의 제일 좋은 것으로 드리지 아니하고 어쩔 수 없이 드림에 대하여 강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양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제사에 바칠 것을 말하였습니다. 부자는 송아지를 드릴 수 있으며 그 보다 못한 이는 염소나 양, 그것마저도 힘든 자에게는 집비둘기를 드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자를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헌신 또한 나의 것을 최대한 다 만들어 놓고 아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실 것입니다.


전에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은 항상 자녀들의 옷을 사면 주일 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첫 날에 아이들에게 입혀서 교회에 보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는 집사님에게 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이걸 샤머니즘이라고 이야기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그 중심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그 보다 더 한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지 말아야 합니다. 합당하게 아까워하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렙돈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과부에게는 그것이 전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특권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기업가들이 온전한 회계 장부를 하지 아니하고 이중장부를 하고 사회에 공헌해야 할 재정을 권력과의 결탁으로 사용된다면 하나님의 근엄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주셨기에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께 헌신하고 받쳐야 합니다. 


제사장들의 변명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렇게 부정한 것들을 받으시겠느냐? 라고 백성들을 책망하자 백성들은 제사장이 이것을 받기 때문이라고 제사장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립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십일조도 바치지 않고 가난하다는 핑계로 아예 제물을 바치지 않으니 병든 것이라도 가지로 온 건 데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순전히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들을 느려 놓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거룩하게 제사를 집행해야 할 제사장들이오. 그런데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죄의 길로 빠르리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더러운 엉터리 같은 기도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성전 문을 닫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라고 강하게 제사장 무리들에게 질책합니다. 9절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기도는, 대단히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겸손한 듯 한 기도는 외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기 전에는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중심은 긍휼을 구할 때 진정한 마음, 참으로 헌신된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정의가 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면 자기보호는 이루어지겠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번제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진실된 기도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자신의 죄악이 보여서 감히 얼굴 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가식, 위선, 가면, 불의 자신의 참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이 한심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더 많이 기도하고 참된 만족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 제가 이 말씀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성전 문을 닫고 싶다. 온전한 제사가 아니면 모든 통로를 닫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헛된 제사를 드려 받자 나는 받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문을 닫겠다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외식적이고 형식적이 된다면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임하여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란 말씀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 내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문을 걸어 닫히고 있습니다. 온전하지 않는 헌신과 바침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많은 분들이 ‘월요병’에 걸립니다. 주일 오전에서 오후 까지 쉬지 못하면서 교회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이 되면 힘이 들어 다른 일들을 데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 주일은 ‘안식일’이라서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주일 예배만 드리고 자기의 여가 생활에 열중하기도 합니다. 저도 청소년과 청년 시절 이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화 되고 내가 주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에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일이 기다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이것을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도 영적, 육적 모두 다 해롭습니다. ‘자기 몰입적’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너무 강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동기 유발에 의한 것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성취형으로 나가기 때문에 남들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을 탓하기도 하기에 공동체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남기신 위대하신 유산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때 필요한 순종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순례 길에서 우리가 찾아갈 보화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것은 바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영광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겸손한 마음으로 이 ‘순종의 학교’를 통하여 믿음의 분량이 날로 날로 성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순종의 학교를 통과했습니다. 모세는 40년을 양을 치면서 살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수많은 시험 속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냥 명하면 되는 것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밧단아람 외삼촌 집에서 순종을 배웠으며 얍복강에서의 결단을 통하여 위해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순종의 사람을 어찌 다 열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은 거짓된 드림, 위선의 삶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왜 성경에 교훈에 주목합니까? 그것을 통하여 내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입에는 꿀 송이처럼 다나 배에서 쓴 것이 있을 수 있고. 입에서 잠시 쓰나 내 배에는 송이 꿀처럼 단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미래에 보면서 현재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제사장들처럼 마치 자신이 하나님보다 관대하게 행동하고 있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의 잘못된 해석, 부주의, 자신의 이익 추구는 자신을 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백성들을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강한 나라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할 때 더 낮게 무릎 꿇어야 합니다. 개신교가 세상에서 비난 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가 급격히 성장할 때 검물 짓고, 교육관 짓고, 선교사 파송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으로 치장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잘못된 것을 받지 말고 순전한 마음을 드리는 자의 것을 받기를 원합니다. 토색한 것은 절대로 받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비로 더디 이루어져 가더라도 온전한 헌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바른 것을 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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